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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의 존중
주머니는 두둑하고 양 손은 한 없이 가볍다. 나날이 유명해지는 학연의 솜씨는 입소문을 타고 퍼졌다. 떡을 사기위해 아랫마을에서 왔다는 넉살좋은 아낙의 수다스러운 칭찬에 학연은 새침하게 웃었다. 내가 또 한 손맛 하지. 인심 좋게 꿀에 절인 깨가 듬뿍 들어간 송편을 두어 개 더 얹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껴야 산다는 옛 선조의 깊고도 심오한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사는 학연이 주머니를 여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그것은 어릴 적부터 알고 지냈던 아우인 상혁에게도 예외는 없었다. 그런 그가 상혁이 사달라 조르는 비빔밥에 도토리묵까지 덤으로 주문해 대접할 정도로 요즘 학연은 엽전 긁어모으는 재미에 푹 빠져있었다. “철쭉아. 너도 짐이 적으니 좋지?” 분홍 꽃이 피는 봄에 태어나 꽃 이름을 붙여주었다. 저가 ..
덕유산은 산이 높고 계곡이 깊으나 산세가 험하지 않아 유한 성정을 가진 산으로 알려져 있다. 홍빈은 나무 둥치에 짐을 내려놓고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천에 색색으로 물든 낙엽이 비단처럼 산을 휘감고 있었다. 특히 나무와 바위가 많아 작은 짐승들이 터를 잡고 살며 귀한 약초들이 많이 자라기로 유명했다. 가을의 풍성함을 그대로 간직한 덕유산은 특유의 인자하고 넉넉한 기운으로 가득했다. 솜이 덧대어진 가죽신을 신은 홍빈은 푹신하게 쌓인 낙엽을 장난스럽게 밟으며 걸었다. 실로 오랜만에 보게 된 풍경이었다. 하늘도 유난히 푸르고 높게 보이는 이곳은 공기마저 다른 듯 코끝 가득 스미는 나무향기에 홍빈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짐을 풀자마자 낙엽더미 속에서 선명하고 색이 아름다운 단풍잎을 하나씩 주우며 돌아다니..
어둠이 무겁게 내려앉은 자정. 일찌감치 저녁을 먹고 잠에 들었던 원식은 감았던 눈을 떴다. 이부자리를 걷고 부스스 몸을 일으켜 앉아 졸음이 가득한 얼굴을 손으로 쓸었다. 눈을 감았을 때와 떴을 때의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할 만큼 어두운 새벽이었다. 뻐근한 목을 이리저리 움직이던 원식은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문고리에 힘을 주고 조심스럽게 밀어내자 나무틀이 서로 부대끼며 삐걱댔다. 원식은 대청마루에 발을 디딘 체 밀려오는 서늘한 새벽공기를 쫓으려 기지개를 켰다. 온 세상이 잠에 빠져든 늦은 새벽이었지만 원식은 뻐근한 몸을 민첩하게 움직였다. 어깨를 이리저리 돌리던 원식은 물을 저장하는 장독뚜껑을 들어 올려 그 속에서 물을 퍼 올렸다. 하루 종일 땡볕은 받은 장독 안에 물은 미지근한 온도로 식어있었다. 홍..
여우구슬이 사라졌다. 홍빈은 벌렁벌렁 뛰는 가슴께를 떨리는 손으로 꾹꾹 눌러 내렸다. 여우구슬이 사라지다니……. 홍빈이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긴장으로 두근대는 심장을 부여잡고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 보아도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덕을 쌓아 구슬이 탁해지지 않게 천년동안 간직해야만 비로소 인간이 되거나 신의 반열에 오르는 자격이 주어지게 되는데, 그 여우구슬이 없다면 평생 요물로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었다. 홍빈은 돌아가신 주지스님의 마지막 말씀이 떠올라 더러워진 옷자락을 찢을 듯 움켜쥐었다. 눈물이 뿌옇게 서려 시야를 가렸다. 커다란 눈물방울이 이미 더러워진 홍빈의 낡은 옷 위로 후두둑 떨어졌다. 여우구슬이 없다면 다음 보름을 넘기기도 전에 본래 모습인 여우로 변할 터였다. 질끈 감은..
남자의 의식이 천천히 돌아오고 있었다. 원식은 그 느리고도 조용한 과정을 숨죽여 지켜보았다. 말간 미간이 찡그려지고 긴 속눈썹이 잘게 떨린다. 눈꺼풀 속에 감추어진 새카만 눈동자가 드러나는 순간은 경이로웠다. 원식은 처음 홍빈을 발견한 날을 떠올렸다. 분명 여인이라 의심치 않았던 가는 몸매와 얇은 허리 그리고 작은 손발까지. 사내의 옷을 입은 그가 상상이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어찌하여 여인의 옷을 입고 산에 쓰러져 있었는가. 의문이 머릿속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작은 신음을 흘리며 몸을 뒤척이는 홍빈에게 시선을 주던 원식은 이것을 가슴속 깊이 묻어두기로 했다. 이유를 안들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원식은 타인의 비밀을 알아내는 것으로 만족감이나 우월함을 느끼는 부류들을 경멸했다. 어찌되었건 복..
더 늦기전 산을 넘겠다 고집을 부린 것이 화근이었다. 아프게 뛰는 가슴을 주먹으로 눌러 내리던 홍빈은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아 이를 악물었다. 산중턱을 넘었을 즈음이었다. 서너 명의 사냥꾼들이 여장을 한 체 산을 오르던 홍빈의 앞길을 막아섰다. 여인의 몸으로 늦은 밤 홀로 길을 나서는 그를 의심스럽게 여긴 것이었다. 숲속을 가로지르며 달리는 홍빈의 발치에 굵은 화살이 날아와 박혔다. 겨우 아슬아슬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곧 따라잡힐 것이 분명했다. 허나 멈추면 죽는다. 피 냄새를 맡고 흥분한 까마귀 떼의 울음소리가 산을 뒤흔들었다. 산을 오르는 것인지 내려가는 것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사방이 캄캄하게 내려앉았다. 홍빈은 비틀거리는 몸을 추스르기 위해 나무에 등을 기대어 숨을 골랐다. 얼마만큼의 ..
물이 흐르는 시간 “안 팔아.” “왜요?” “내 마음이지.” 홍빈은 울상이 되어 입을 다물었다. 근데 전화 온 사람이 연예인이래요. 그 왜 막장 수목드라마에 나오는 주인공 아줌마 있잖아요. 홍빈은 전화기를 손바닥으로 틀어막으며 중얼거렸다. “아줌마고 아저씨고, 안 판다는데 왜 자꾸 난리야.” “그래도...” “시끄럽고. 벨라 밥이나 주고와.” “싫어...” “쓰읍, 까분다.” 학연이 팍 인상을 쓰자 금세 쭈굴쭈굴해진 홍빈이 전화기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장이 까라면 까야지. 알바생은 힘이 없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마가 꼈었던 게 틀림없다. 왜 멀쩡한 일자리를 놔두고 여길 왔을까. 목장갑에 비닐장갑까지 꼼꼼하게 장착한 홍빈의 표정이 일분일초마다 짜게 식어간다. 그냥 평범한 물고기 밥은 먹을 수 없..
와사비 WASABI "형! 나 배고파." 밥 맡겨놨나 이자식이. 가게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밥을 찾는 상혁의 목소리에 원식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수족관에서 뜰채로 펄떡펄떡 날뛰는 자연산 광어 한 마리를 잡아 도마 위에 올린 원식이 미간을 팍팍 찡그리며 사시미 칼을 옆으로 눕혀 광어 대가리를 신나게 두드렸다. 순조롭게 기절한 광어의 꼬리와 지느러미에 칼집을 내자 카운터위에 책가방을 던져놓은 상혁이 고양이처럼 원식의 주변을 살금살금 얼쩡거렸다. “나 주려고?” “참나, 주방 가서 인사하고와.” 저 왔어요오! 주방에서 홀로 음식이 나오는 카운터에 머리를 쑥 들이민 상혁이 우렁찬 목소리로 인사를 하자 주방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여럿 터져 나왔다. 예리한 칼끝의 감각을 이용해 광어의 뼈와 살을 분리하던 원식의 ..
하나. 라망 La Main [재환씨.] "뭐하고 있어요?" [그냥…….] "지금 서울 올라가는 길이에요. 거의 다 도착했는데." [아.] "배고파요" […….] "택운씨?" [김치찌개 끓일 건데.] "보고 싶어요, 금방 갈게요." 조심해서 운전해요. 재환은 택운 특유의 말끝이 뭉개지는 발음을 들으면서 조금은 바보 같은 웃음을 지었다. 짧은 통화였다. 전화 통화 뒤 갑자기 찾아오는 짧은 적막은 늘 묘한 기분이 들게 했다. 예를 들면 외로움이라던가 혹은 설렘 같은 것. 재환은 귀에서 핸즈프리를 뽑아 조수석에 던진 뒤 조금 더 세게 엑셀을 밟았다. 아이팟을 재생시키자 잔잔한 일렉트로니카풍의 노래가 적막한 공기를 채웠다. 택운이 골라놓은 플레이 리스트였다. 하루 종일 자동차 핸들만 붙잡고 있었더니 손마디가 쑤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