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퍝ㅌ/연성 (6)
취향의 존중
이불 속에 파묻혀 몸을 뒤척이던 남자는 팔을 뻗어 탁상 위를 더듬었다. 좀처럼 손에 닿지 않는 핸드폰이 경박한 알림 소리를 내며 울었다. 감은 눈으로 탁상을 더듬어 핸드폰을 손에 쥔 남자는 감았던 눈꺼풀을 억지로 밀어 눈을 떴다. 남자의 하루 시작을 알리는 소리였다. 남자는 잠이 가시지 않은 듯 연신 미간을 찌푸리며 핸드폰을 쥔 손을 느리게 움직였다. 가장 먼저 보이는 화면 위로 그 달의 스케줄이 떠 있었다. 7월의 첫째 주. 붉게 적힌 숫자 아래는 아이의 생일이 있었다. 남자는 방안에 앉아 집안을 조용히 움직이는 인기척을 들었다. 그리고 멀지않은 욕실에서 흐르는 물소리도. 그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정확히 8년 전에 끊었다. 그는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기며 그날 이후로 하지 않게 된 것들에 대해서 ..
“곧 졸업인데. 무슨 이유라도 있나?” “아니요, 그런 건 없습니다.” 걱정스러운 담임교수의 목소리에 자꾸만 시선이 문 쪽으로 향한다. 이런 불필요한 친절은 부담스럽다. 택운은 인생의 타이밍에 관해 논하는 교수의 얼굴 앞에 종이를 들이밀고 싶은 충동을 조용히 참았다. 밤낮없이 불면증으로 침대를 뒤척이게 만들던 열대야가 물러가고 이제는 아침저녁으로 가디건을 걸쳐야 할 만큼 서늘해졌다. 어거지로 교수의 도장을 받아 휴학신청서를 낸 택운은 제법 쌀쌀한 공기에 어깨를 움츠리며 학교 정문을 나섰다.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원래 택운은 결정을 내리고 행동에 옮김에 있어서 깊게 생각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벌써 소문이 돌았는지 택운의 핸드폰이 쉴 새 없이 울려대기 시작했다. 미련 없이 핸드폰을 끈 택운은 집으로 가던 방..
#겟잇뷰티 "...피디님 제가 정말 말주변이 없어서..." "괜찮아, 택운씨. 우리 엠씨가 보통이 아니거든. 다 커버해줘. 택운씨가 한마디만 해도 그냥 줄줄 읉어준다니까." "근데 저 진짜..." - 자, 그럼 러블리 메이크업의 트랜드셋터 정택운 메이컵 아티스트님 모셔볼까요? 쇼프로에서 10초 이상 정적이 흐른다는건 대형 방송사고 감이라며 잔뜩 겁을 주던 재환의 목소리가 머리속에서 무한재생 중이었다. 진행자의 멘트가 끝나자마자 스튜디오 석에서 열렬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정택운님 나가실게요! 쨍한 스텝의 목소리가 택운의 귓가에 귀곡성처럼 울린다. 긴장으로 까무러치기 직전인 택운의 얼굴이 벌써부터 하얗게 굳었다. 무표정한 얼굴과 긴장으로 상기된 두 볼은 매우 기괴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좀처럼 발이..
[켄엔] a. 오또카지 사과 박스만큼이나 커다란 상자들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서점 입구에 차곡차곡 쌓였다. 까만 뿔테안경을 코끝에 아슬아슬하게 걸친 학연이 미간을 잔뜩 모은 체 주문서류에 적힌 목록을 빠른 속도로 훑었다. 볼펜을 들고 주문서류에 사인을 하는 학연의 모습을 멍하게 구경하던 재환은 한숨을 내쉬었다. 단아한 얼굴에 작게 찌푸려진 미간이 금욕적이었다. 멀찍이 학연이 일하는 모습을 훔쳐보던 재환은 미칠 것 같았다. 반쯤 걷어 올린 셔츠 소매 사이로 드러난 모카색 손목에 동공을 박제한 재환이 마른침을 삼키며 입맛을 다셨다. 사장님 직업 환경이 너무 위험한 것 같습니다. 방해요소가 이렇게 많은 줄 알았으면 진작부터 일하러 오는 건데. 감사합니다아리가또세세. 대낮부터 빨간딱지가 덕지덕지 붙은 상상을 하..
[택엔] 두 입술 사이 거리는 아직 "괜찮으세요?!" 택운은 정말 괜찮았다. 의식도 있었다. 단지 너무 쪽팔려서 눈을 뜨지 못했을 뿐. 안되겠다. 인공호흡 해야겠어. 귓가에 카랑카랑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택운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떤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물에 젖은 말캉한 입술이 택운의 입술에 닿았다. 분명 남자 목소리였는데. 그런 것을 따지기엔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결국 택운은 물에서 건진 고목나무처럼 뻣뻣하게 누워 인공호흡을 받았다. 택운은 중학교 때 국가대표 축구선수였다. 운동신경이 좋은 편이었고 축구를 그만둔 지 10년이 지난 지금도 택운은 자신의 운동신경은 좋은 편이라 굳게 믿었다. 그리고 오늘. 믿었던 도끼가 택운의 발등을 신나게 후려치고 사라졌다. 운동신경은 개뿔. 택운의 턱을 단단하게 ..
1. “허리 주물러줘?” “저리 꺼저.” 적당히 하라고 그렇게 말했건만. 분명 메이크업과 세팅한 머리 때문에 안 된다고 했다. 빌어먹게 몸케미만 좋아가지 정신을 차려보니 침대 위라 학연은 기가 찼다. 뒤로 하면 된다며 뻔뻔한 얼굴로 옆구리를 지분댈 때 알았어야 했다. 옆구리는 학연의 성감대였다. 눈치 없는 정택운은 그런 것만 귀신같이 알아챘다. 개운한 표정으로 화장실에서 나온 택운은 타월 한 장을 허리에 두른 체 냉장고를 뒤져 음료수를 꺼내마셨다. 모델 같은 포즈로 테이블에 비스듬히 기대선 택운은 침대위에 비스듬하게 기대앉아 오만상을 찌푸리고 앉아있는 학연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는 끔찍하게도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많이 아파?" 학연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낭창하게 되묻는 저 인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