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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랍콩] 구미호 반려전 1 본문

퍝ㅌ/장편

[랍콩] 구미호 반려전 1

밤비v 2015. 11. 30. 21:29


더 늦기전 산을 넘겠다 고집을 부린 것이 화근이었다. 아프게 뛰는 가슴을 주먹으로 눌러 내리던 홍빈은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아 이를 악물었다. 산중턱을 넘었을 즈음이었다. 서너 명의 사냥꾼들이 여장을 한 체 산을 오르던 홍빈의 앞길을 막아섰다. 여인의 몸으로 늦은 밤 홀로 길을 나서는 그를 의심스럽게 여긴 것이었다. 


숲속을 가로지르며 달리는 홍빈의 발치에 굵은 화살이 날아와 박혔다. 겨우 아슬아슬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곧 따라잡힐 것이 분명했다. 허나 멈추면 죽는다. 피 냄새를 맡고 흥분한 까마귀 떼의 울음소리가 산을 뒤흔들었다. 산을 오르는 것인지 내려가는 것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사방이 캄캄하게 내려앉았다. 홍빈은 비틀거리는 몸을 추스르기 위해 나무에 등을 기대어 숨을 골랐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주위는 온통 칠흑 같은 어둠이 가득했다. 깊은 산속에서 방향감각까지 잃어버린 듯 했다. 자신을 쫒는 사냥꾼과 들개의 울음소리가 환청인지 현실인지 구분할 수가 없을 만큼 멀게 느껴졌다. 


큰 짐승의 울음소리가 지척에서 울렸다. 도망쳐야해. 어깨에 입은 상처에서 피가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홍빈이 입은 옥색 저고리는 이미 본연의 색을 잃은 지 오래였다. 손에 움켜쥔 여우구슬이 귀곡성을 내며 슬피 울었다. 흐려지는 시야에 자꾸만 눈이 감긴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홍빈은 그대로 흙바닥을 나뒹굴었다. 손안에 감긴 구슬이 생기를 잃고 떨어져 내린다. 홍빈이 세상을 나온 지 이틀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center> 

 김원식x이홍빈

</center>





밤새 내린 이슬방울이 원식의 발목을 적셨다. 새벽안개가 걷히지 않은 산속의 공기는 서늘했다. 가을이 성큼 다가온다는 신호였다. 가을 나무는 물이 적어 패기가 쉽지만 나무껍질이 단단해지기 때문에 도끼날이 상하기가 쉬웠다. 원식은 주문받았던 땔감의 양을 계산하며 부지런히 산을 올랐다. 가을부터 부지런히 움직여야 겨울을 따듯하게 날수가 있기 때문에 벌써부터 주문이 밀려드는 상황이었다. 


덕유산은 본디 유한 성정을 지녔으나 계곡이 깊고 산세가 험해 좀처럼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숲속이 묘하게 들뜬 것을 눈치 챈 원식은 산을 오르던 발걸음을 천천히 늦추었다. 흔치 않는 풍경이었다. 밤새 들짐승끼리 영역싸움이라도 벌인 것인지 긴장감이 맴도는 숲이 소란스럽기 그지없다. 어깨에 둘러맨 도끼를 만지작거리던 원식은 멀지 않은 곳에서 들리는 짐승의 울음소리에 그나마 움직이던 걸음마저 멈추고 말았다. 큰 짐승의 울음 소리였다. 


무슨 일인가. 원식은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도끼를 손에 쥐었다. 


원식은 몸을 낮춰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밤새 무슨 일이 있었것인가. 원식은 도끼를 고쳐 잡으며 마른침을 삼켰다. 핏자국이 한 방향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풀숲사이에 쓰러져 있는 무언가를 발견한 원식은 도끼를 손에서 놓칠 만큼 놀라고 말았다. 인적이 드문 산속에 한 여인이 쓰러져 있었다. 큰 상처를 입은 듯 한쪽 어깨에서 흘러내린 핏자국이 온 저고리를 붉게 적시고 있었다. 원식은 뒷목이 서늘하게 식는 기분을 느끼며 쓰러진 여인의 목 언저리를 손끝으로 눌렀다. 희미하게 뛰는 맥박은 금방이라도 꺼져버릴듯 위태로웠다. 하얗게 질린 입술은 이미 푸른빛마저 돌았다. 일각일초가 시급한 상황이었다. 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원식은 주저하지 않고 차갑게 식어가는 여인을 들쳐 업었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올랐던 길을 되짚기 시작했다.



홍빈은 꿈을 꾸고 있었다. 작은 여우가 되어 새카만 어둠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다. 발톱을 세워 아무리 뜀박질을 해도 그것은 점점 더 홍빈의 꼬리를 잡아챌 듯 쫒아왔다. 그것은 인간의 손아귀가 되기도, 혹은 날카로운 화살이 되기도 하며 홍빈을 위협했다. 컁! 어린 짐승의 울음소리는 어둠속을 휘돌고 또 돌아 더 큰 외로움이 되어 나타났다. 눈앞은 낭떠러지였다. 


“정신이 좀 드는가.”

“으...”


어허, 움직이지 마시게. 눈을 뜨자 밀려오는 통증에 홍빈은 얕은 신음을 흘렸다. 온몸이 타는 듯 뜨거웠다. 홍빈은 온전치 못한 시야로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특별할 것 없는 그러나 낯선 방안. 코끝에 짙은 참나무향이 스몄다. 그것은 묘한 안정감을 주는 냄새였다. 여기는 어디일까. 열이 올라 몽롱한 홍빈의 눈가에 차가운 수건이 닿았다. 홍빈은 그제야 자신의 얼굴이 온통 젖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지독한 악몽을 꾸었다고 생각했는데 울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눈물 맺힌 속눈썹을 깜빡이자 물방울이 양 볼을 타고 흘렀다. 그것을 지켜보던 의원은 혀를 찼다. 어쩌다 이런 험한 일을 당했을고... 


나는 이 마을 의원일세. 산 속에 쓰러져 있던 자네를 나무꾼이 발견했다네. 피 묻은 수건과 붕대를 정리하던 노인은 방 한구석에 놓여있던 화로의 불씨를 뒤적이며 말했다. 


“무슨 일인지 모르나 여긴 안전하니 걱정 말거라."


한층 편안한 얼굴로 잠에든 홍빈을 두고 밖으로 나온 의원은 문밖을 서성이는 원식을 보고 작게 혀를 찼다. 의원이라고 밝힌 영감은 달에서 불노불사의 약을 만들어 보름에 한번 인간세계로 내려온다는 월묘月卯였다. 사냥꾼의 무차별적 학살에 실로 씨가 말랐다던 소문이 돌던 영물이 아니었던가. 그런 미호를 발견한 이가 하필 원식이라니. 월묘영감은 이른 새벽 다급한 얼굴로 의원댁 문을 두드리던 원식의 모습을 떠올렸다. 급하게 짐을 챙겨 도착한 이곳엔 피를 흘리며 죽어가던 어린 미호가 있었다. 


원식에게서 끓인 물과 깨끗한 천을 받아 방문을 걸어 잠갔던 시간이 반나절이었다. 그렇게 어린 미호를 치료하는 반나절동안 원식은 움직이지도 않고 문 앞을 지켰던 것이었다. 


“어찌 되었습니까.”

“괜찮다. 방금 잠들었느니라.”

“감사합니다. 어르신.”

“아니다. 오늘은 깨지 않을 테니 자네도 가서 쉬게. 내일 약을 지어 보내마.”


안심한 표정을 지으며 꾸벅 인사를 올리는 원식의 어깨를 두드린 노인이 뒷짐을 지고 문밖을 나섰다. 어쩌다 저리 어린 여우가 사냥꾼에게 쫒기는 신세가 되었을고. 나무꾼의 집을 돌아보던 노인은 혀를 차며 발걸음을 옮겼다. 초가집 지붕위로 저녁을 짓는 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의원을 문 앞까지 배웅한 원식은 착잡한 기분이 되어 얼굴을 쓸었다. 푸닥거리 하듯 더운물을 준비하고 치료를 돕기 위해 분주하게 뛰어다니던 시간은 잠시였을 뿐이었다. 해가 저물도록 열리지 않던 방문 앞을 온종일 서성대던 원식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마루에 털썩 주저앉았다. 


팔과 어깻죽지로 이어지는 깊은 검상이었다. 조금씩 약해지는 숨소리에 이를 악물고 숲을 내질렀던 긴장감이 쉬이 사라지지 않아 원식은 마른 얼굴을 쓸었다. 위험한 고비는 넘겼다고 했으니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될 터였다. 그럼에도 떠나지 않는 의문에 원식은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방문 너머를 몇 번이고 살피고 또 살펴야 했다. 



-




“형님!”

“혁이 왔구나.”

“할아범 약재 배달요. 좀 어때요?”

“아직. 상처가 깊다고 들었다.”


잡생각으로 날밤을 지새운 듯 거뭇하게 내려앉은 턱수염을 마른 손으로 쓸던 원식이 약을 건네받았다. 탕기에 약을 달이는 동안 멀뚱히 서서 마당을 구경하던 상혁이 굳게 닫힌 방문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중한 상처를 입었기에 성정이 느긋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노인네가 밤새 약을 지어 해가 뜨자마자 상혁을 보낸단 말인가. 호기심이 동해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상혁은 결국 손가락으로 문을 조심히 밀어 안을 들여다보고 말았다. 이불위로 드러난 하얗고 작은 손, 작은 얼굴과 배게 밖으로 흘러내린 긴 머리카락을 본 상혁이 눈을 크게 떴다. 여인이 잠들어 있었다. 원식 형님의 방에 묘령의 여인이 누워있다! 홍빈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자 상혁의 얼굴이 괜스레 붉어졌다. 큼큼. 상혁은 헛기침 소리를 내며 문을 닫고 주변을 살폈다. 워. 대박사건. 


“할아버지는 환자가 저런 미인이라고 왜 말을 안 했나 몰라. 꽃 한 송이라도 꺾어 올걸 그랬네.”


조심히 문을 닫고 투덜대는 상혁의 중얼거림을 들은 원식이 말없이 얼굴을 붉혔다. 의심할 여지없이 고운 여인의 얼굴을 한 이가 사내였기 때문이었다. 의원이 말해주지 않았다면 아마 꿈에도 몰랐을 사실이었다. 사내라니.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 믿기가 쉽지 않았다. 의원에게서 건네받은 약과 붕대를 갈기 위해 결례를 무릅쓰고 벗겨낸 저고리에는 여인이라면 엄연히 있어야할 것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분명 자신과 같은 상체를 지닌 사내였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으리라 짐작할 뿐, 내색은 하지 않았으나 원식은 적잖이 놀라고 말았다. 목숨을 위협받는 왕가의 자식이라도 된단 말인가. 허나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마을에는 권력의 힘이 좀처럼 미치지 않았기에 수도의 상황을 알 리 없는 원식은 마음이 갑갑해졌다. 인적 드물기로 유명한 산기슭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있던 모습을 떠올린 원식은 조금이라도 늦게 발견하였으면 어찌했을까하는 생각이 들어 그만 눈앞이 아찔해졌다. 


어쨌든 원식은 굳이 상혁에게 그가 여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기로 했다. 정체를 숨기기 위해 했던 여장이라면 상혁도 모르는 것이 나을지도 몰랐다. 산에서 나는 수많은 풀을 구분하여 약초를 찾아내는 눈썰미를 가진 상혁이 진심으로 여인이라 착각할 만큼 사내의 얼굴은 아름다웠다. 원식은 말없이 마당에 주저앉아 약탕기의 불씨를 살폈다. 


“형님 잘해보셔요. 혹시 생명의 은인이라며 은혜를 갚으려 할지도 모르잖아.”

“영감님 목빠지겠다. 어서가봐.”

“하하. 다음에 기운을 돋우는 약초를 좀 가져올게요.”

“그래 고맙다.”


그러니까 결국 또 오겠다는 소리였다. 죽을 고비를 넘긴 환자를 두고 저런 농이나 하고 있으니 매번 영감님께 혼쭐이 나는 것이 아닌가. 원식은 실없는 농담을 하는 상혁을 보며 작게 웃었다. 원식의 옆구리를 쿡쿡 찔러대며 장난을 치던 상혁은 끝까지 웃는 낯을 숨기지 않은 채 마을로 깡충깡충 내려갔다. 


마을로 돌아온 상혁은 속으로 원식을 연모하는 수많은 소녀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전했다. 원식과 친형제처럼 지내는 상혁의 환심을 사기위해 그녀들이 가져다 바친 선물들은 온전히 상혁이 뒷주머니 속으로 들어가지 않았던가. 물론 원식은 그 사실을 몰랐지만. 매번 산으로 들로 나다니는 원식은 눈치가 없는 것인지 도통 여인들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아 뭇 많은 소녀들이 애꿎은 속앓이만 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런 형님의 집에 절세가인이 누워있으니 이것은 끝난 놀이란 말이지. 암. 상혁은 앞으로 가벼워질 자신의 뒷주머니 사정을 잠시 걱정하며 간질간질한 입술을 털기위해 재빠르게 마을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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