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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택] 소소한연애담 본문

퍝ㅌ/장편

[켄택] 소소한연애담

밤비v 2015. 11. 23. 00:00


하나. 라망 La Main





[재환씨.]

"뭐하고 있어요?"

[그냥…….]

"지금 서울 올라가는 길이에요. 거의 다 도착했는데."

[아.]

"배고파요"

[…….]

"택운씨?"

[김치찌개 끓일 건데.]

"보고 싶어요, 금방 갈게요."



조심해서 운전해요. 재환은 택운 특유의 말끝이 뭉개지는 발음을 들으면서 조금은 바보 같은 웃음을 지었다. 짧은 통화였다. 전화 통화 뒤 갑자기 찾아오는 짧은 적막은 늘 묘한 기분이 들게 했다. 예를 들면 외로움이라던가 혹은 설렘 같은 것. 재환은 귀에서 핸즈프리를 뽑아 조수석에 던진 뒤 조금 더 세게 엑셀을 밟았다.  



아이팟을 재생시키자 잔잔한 일렉트로니카풍의 노래가 적막한 공기를 채웠다. 택운이 골라놓은 플레이 리스트였다. 하루 종일 자동차 핸들만 붙잡고 있었더니 손마디가 쑤셨다. 혈액순환이 안 되는 손끝이 차갑게 시렸다. 회사로 출근하는 대신 재환은 새벽부터 차를 몰아 평창으로 내려왔다. 거래처에서 좋은 나무를 내놓았다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평창은 서울보다 조금 더 추운 것 같았다. 재환은 추위라면 치를 떨었다. 그냥 추운 것이 싫었다. 손이 차갑게 식는 것도, 코가 새빨개지는 것도. 그래서 재환은 양 볼이 발갛게 익고 온몸이 노곤해질 정도로 히터를 빵빵하게 틀어놓고 고속도를 신나게 달렸다. 기름 값 고민 고민하지 마. 재환은 속으로 웃었다. 지갑 안에는 법인카드가 고이 모셔져 있었다.   







내가 신청한 수업은 이게 아닌데.



어정쩡한 자세로 고개를 숙인 체 강사님이 불러주시는 레시피를 열심히 받아 적던 재환은 쌔한 기분에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재환의 키에 턱없이 낮은 조리대위에서 구부정한 자세로 칼질을 하느라 재환은 벌써부터 허리가 쑤셨다. 집에 가고 싶다. 여긴 어디. 난 누구. 



재환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했다. 무엇이 어디부터 잘못되었나.



그랬다. 재환의 두 형이 결혼을 하고 분가를 하자 부모님의 관심이 온전히 재환에게 돌려지게 된 것이 이 모든 사건의 시초였다. 눈치 빠른 재환이 선수를 쳐 독립선언을 한 것이 발단, 금이야 옥이야 키운 막내아들이 홀아비 냄새 풍기며 매 끼니를 라면으로 때우는 꼴은 죽어도 못 보겠다하신 김 여사의 엄포가 위기. 그러하면 요리학원이라도 보내는 게 어떻겠느냐고 의견을 던지신 아버지가 절정. 한식 조리 자격증이라도 따야 독립을 해도 마음이 놓일 것 같다는 김 여사의 푸념을 결말로 재환은 기승전결을 차근차근 밟아 제 발로 요리 학원을 찾아온 것이었다.



가만 생각해 보면 스스로 무덤을 팠거나 다름없었다. 재환은 뒤늦게 김 여사의 계략에 놀아난 것을 눈치 챘으나 이미 엎어진 물은 주워 담을 길이 없었다. 재환의 분가선언보다 자신들이 재환에게 눈치를 줄 거라 생각했다는 점이 그녀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사탕 꿰듯 줄줄이 보내려던 게 아니라 어쩌다 보니 큰애와 작은애가 결혼을 비슷한 시기에 하게 된 것뿐이었다. 막내아들의 그런 조숙함이 김 여사는 조금은 불만이었다. 소중한 내 아들인데. 남편 빼고 다니는 둘만의 데이트라던가 모자母子가 사이좋게 손잡고 쇼핑을 다니는 풍경은 아들을 가진 모든 어머니의 로망이었다. 소녀감성 그것은 나이를 불문하고 그녀들 마음 한 구석에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처럼 존재했다. 그리고 자식농사를 빨리 마무리 짓고 황혼커플의 여유를 즐기고 싶은 마음 또한 진심이었다. 김 여사는 진심으로 아들 셋을 키우는 것보다 지옥견이라 불리는 비글 세 마리를 키우는 것이 더 쉽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그녀의 남편도 아들 못치 않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리하여 요리학원에 등록한 재환은 강사님이 불러주시는 알타리 열무김치의 양념재료를 열심히 받아 적다 문득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총각무 8000g, 물 8000ml, 천일염 8000g. 천 그램이면 일 키로가 아니던가. 내가 숫자를 잘못 받아 적었나. 어째서 소금이 8kg나 필요한 걸까 심각하게 고민하던 재환은 학구열을 불태우며 꼼꼼하게 필기를 하시고 계시는 옆자리 아주머니의 노트를 슬쩍 훔쳐보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래도 반을 잘못 온 것 같다. 



온몸에 액젓냄새가 진동을 했다. 재환은 얼마 입지도 않은 정장 자켓을 또 세탁소에 맡겨야 한다는 사실이 짜증이 났다. 수업시간 내내 입도 뻥끗 못하고 영혼 없이 서있던 재환은 얼결에 함께 요리를 하게 된 아주머니의 등쌀에 못 이겨 고무장갑을 끼고 무를 양념에 버무리고 설거지까지 말끔하게 한 뒤에야 수업을 벗어날 수 있었다. 내 팔자야. 축축하게 젖은 셔츠 소매 끝을 손으로 문질 거리던 재환은 씩씩대며 요리학원 원장실문을 두드렸다. 



“수강 취소하려고요. 환불됩니까?”

“네 근데 무슨 일이라도?”



무슨 일이냐면 김치는 본래 빨간 줄로만 알았던 재환이 첫 수업부터 창업 요리 반에 들어가 알타리 무 28인분을 썰고 바닥에 쪼그려 앉아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알타리 김치 28인분을 버무린 일이었다. 짠 내가 펄펄 나는 소금 포대에서 8000g만큼의 소금을 퍼 담는 일은 쉬운 노동이 아니었다. 재환은 그날 쌀가마니만한 소금 포대를 태어나서 처음 보았다. 수업을 듣던 어머님들이 재환을 친아들처럼 부렸기에 재환은 싫다는 소리 한번 못하고 잔심부름을 도맡았다. 재환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없이 서있자 위생사 가운을 입은 여자 강사가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까 재환의 요리 수업 신청을 도와주던 강사였다. 



“저는 생활 요리반으로 신청했는데요.”

“어머.”



난감한 듯 손끝으로 입을 가리는 그녀의 표정을 본 재환은 말없이 사무실 책상 위에 놓인 종이휴지 상자에서 티슈 한 장을 뽑아들고 젖은 손을 닦았다. 남의 물건을 허락 없이 쓰는 건 실례되는 행동인건 알지만 젖은 손이 신경 쓰였다. 얇은 종이 휴지가 물을 먹어 손끝에 조각조각 달라붙자 재환은 더 신경질이 났다. 화장실은 못 찾겠고 조리실에는 행주만 있고 수건이 없었다. 



마침 조리사 자격증반 수업을 마친 택운이 원장실로 들어섰다. 정확히 말하면 들어오려다가 말았다.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살벌한 분위기에 택운은 살짝 당황했다. 원장실 안으로 몸을 반쯤 들이밀다 어정쩡하게 멈추어 선 택운이 눈을 크게 깜박이며 말없이 자신의 책상에 삐딱하게 기대앉은 남자와 여강사를 번갈아 보았다.  재환이 손바닥에 달라붙은 휴지조각을 신경질 적으로 긁어내자 더욱 당황한 지은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택운을 불렀다. 



“아, 원장님.”



지은씨 거기서 날 부르면 어떡해요....













택운은 한참 적어 내려가던 문장위로 까만 선을 죽죽 그어버렸다. 아 마음에 안 들어. 택운 손이 스칠 때마다 잉크가 뭉친 부분의 글씨가 얼룩덜룩하게 번졌다. 시퍼렇게 물든 손끝을 물티슈로 닦아내던 택운이 한숨을 쉬었다. 



매달 출간되는 쿠킹 매거진에 들어갈 여덟 번째 칼럼이었다. 한식과 노트-바이-노트 (note by note) 쿠진을 접목한 요리에 대해 소개하는 것이 택운이 소개하는 글의 주 내용이었는데, 아직은 많이 알려지지 않은 분자요리를 한식 조리법 통해 풀어내는 글을 썼던 저번 달 글이 대박이 나자 나긋나긋하던 편집장이 택운에게 은근슬쩍 부담을 주기 시작한 것이었다. 턱을 괴고 손에 쥔 펜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굴리던 택운은 시커먼 줄이 좍좍 그인 A4용지를 뚫어지게 내려다보며 엄지손가락 끝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에이, 지지.”

“으응…….”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가진 체 글을 쓰려고 자리에 앉자 머릿속이 새하얗게 질리는 기분이었다. 텅 빈 워드페이지 위에서 일정하게 깜박이는 커서를 보고 있으면 마치 홀린 것처럼 머리가 멍해진다. 뭐라도 적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며칠째 새하얀 모니터와 눈싸움을 하던 택운은 이제 빈 종이를 붙들고 씨름하던 중이었다. 쉬었다 하세요. 택운의 책상 위에 방금 내린 커피를 툭 내려놓은 지은이 손끝을 물어뜯는 택운의 손등을 가볍게 튕겼다. 원장님 그러고 있으면 심통난 애 같아요. 지은씨 나 서른 넘었는데. 축 늘어진 몸을 삐걱삐걱 움직여 바른 자세로 앉은 택운은 2년 전 고용한 풀타임 강사에게 억울한 눈빛을 보냈다. 맞은편 책상에 털썩 주저앉아 손등위에 핸드크림을 치덕치덕 바르던 지은은 택운을 흘끔 보더니 손에 쥔 핸드크림을 달랑달랑 흔든다. 



“바르실래요?”



대답을 듣기도 전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지은은 택운의 손등위에 핸드크림을 꾹 쥐어짰다. 말없이 자신의 손등을 내려다보던 택운이 꼼지락거리며 양손에 핸드크림을 펴 발랐다. 이런 거 끈적거려서 싫어요…….  



“바르고 씻어요.”



그럼 핸드크림을 바르는 게 무슨 소용이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손을 씻으면서 꼬박꼬박 로션을 챙겨 바르는 부지런함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연필을 내려놓은 택운은 미끈거리는 손등을 손가락으로 슥슥 문질렀다. 손끝에서 달달한 베이비파우더 향이 묻어났다.



"앗싸, 컬러독점!"



스마트폰을 움켜쥐고 땅따먹기 게임에 열을 올리던 지은은 다음 수업준비를 해야 한다며 커피가 담긴 텀블러를 챙겨들고 부산스럽게 뛰쳐나갔다. 문이 열리면서 들어온 찬바람에 책상위에 쌓인 A4용지가 팔락팔락 나풀거렸다. 머그잔을 쥔 택운은 손끝으로 머그컵 손잡이 윗부분을 만지작거리자 유약 처리된 매끈한 표면 위로 지문이 얼룩덜룩 찍혔다. 아, 쓰기 싫다. 











원장실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택운은 괜히 책상위에 잔뜩 쌓여있는 종이 뭉치를 뒤적였다. 너무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어서 눈을 못 마주치겠다. 어제 청경채 들어온 거 다듬어야 되는데. 내일 심화요리반이랑 써볼까……. 잡지사에 원고도 보내줘야 하고……. 택운은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이번 달 원고를 독촉하던 편집장님과의 통화를 떠올렸다. A4용지에 빼곡하게 적힌 글씨가 지렁이처럼 새하얀 종이 위를 꾸물꾸물 기어 다녔다. 내가 쓰긴 했지만 진짜 읽기 싫다. 모퉁이가 구겨지고 잉크가 번진 종이뭉치를 집어 양손으로 쥐고 톡톡 책상 위를 두드렸다. 가지런하게 정리된 A4용지 뭉치를 아까의 종이뭉치 위에 다시 올려놓자 맞은편에 앉아 택운을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남자가 눈썹을 슬쩍 추켜세운다.



“그쪽이 원장이에요?”

“아니요. 음, 네.”



험악한 인상을 짓는 재환 몰래 택운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엄밀히 말하면 원장은 택운의 부모님이셨다. 애초부터 택운에게 넘겨주실 작정이셨는지 택운이 요리강사로써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마자 미련 없이 경주로 내려간 일이 벌써 2년 전이었다. 



“계좌번호 여기 적어주시면 수업료 송금해드릴게요.”

“아니. 그건 됐고 개인강습도 해줍니까?”



정리해야지, 해야지 하고 매번 마음을 먹으면서도 막상 손댈 엄두를 못 내던 책상 위를 복잡한 심경으로 보고 있던 택운이 눈썹을 슬쩍 치켜들었다. 택운이 직접 하는 개인강습은 가격이 비쌌다. 택운은 우리나라에 몇 없는 쿠킹 매거진에 몇 페이지나 되는 칼럼을 매달 꾸준히 써 올리는 요리강사였다. 한마디로 쉽지 않은 남자라는 뜻이었다. 잠시 말없이 재환의 의도를 살피던 택운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 배우시게요.”

“뭐, 일상 요리?”

“그런 거 요즘 인터넷에 많이 나와요.”

“개인강습 해주세요. 얼마면 됩니까?”







 둘. 너와 나의 거리





“먼저 마른 멸치를 불에 볶아줘야 해요.”

“왭니까.”



국자를 쥔 택운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질문은 좋은 거라고 배웠는데. 택운은 재환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냄비 위의 멸치조각을 거칠게 뒤적였다. 재환은 삐딱하게 선 체 어깨너머로 택운의 요리를 구경하고 있는 중이었다. 감정 기복이 좀처럼 얼굴에 드러나지 않는 택운은 슬슬 짜증이 올라오고 있었다. 



수업태도가 불량하시네요. 밥해먹기 싫으세요?  



“그야 잡냄새를 없애주니까…….”



한참의 정적 끝에 흘러나온 나른한 미성은 혀끝에서 솜사탕처럼 뭉개졌다. 택운은 계량컵에 담아 두었던 다시마육수를 냄비에 쏟아 부으며 한숨을 쉬었다. 돈 벌기 힘들다아. 스트레스 받는 기분. 등 뒤에 바짝 붙어선 재환이 신경 쓰인다. 당신과 나의 거리가 너무 가까운 것 같으니 물러서 주세요라고 말해버리면 되레 이상한 사람이 되는 미묘한 거리. 목덜미가 간질거려 저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불편해. 뒷목이 쭈뼛쭈뼛 서는 기분에 택운은 애꿎은 입술만 잘근잘근 씹는다. 살짝 밀어볼까. 진짜 싫다.



우리는 모두 일정한 공간을 유지하며 살아간다. 누구에게나 허용되는 거리가 있는가 하면, 아주 가까운 사람에게만 내어주고 싶은 거리가 있다. 일정 반경 안으로 다가설 경우 불편함을 느끼게 되는 타인과 나의 안전거리. 택운은 그저 보통 사람보다 조금 더 넓은 안전거리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상대방이 개인공간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다가와서 신체 접촉을 서슴지 않는 재환이 미치도록 부담스럽다는 소리였다.




조리대 앞으로 몸을 최대한 가까이 붙인 택운은 들고 있던 국자를 소리 나게 조리대 위에 내려놓았다.  긴 소매 아래 가려진 팔위의 솜털이 죄다 곤두서는 기분에 택운이 손끝을 잘근잘근 씹었다. 눈을 질끈 감고 뒤로 돌아서자 한발자국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재환이 자신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팔짱을 낀 재환의 표정이 왠지 서늘했다. 날카롭지 않은 곳이 없는 얼굴. 눈매가 깊어 이목구비 뚜렷한 얼굴에 그림자가 질 정도였다. 재환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 택운의 시선이 자동으로 아래로 떨어졌다. 왠지 주눅 들어.  



고의성이 다분한 행동이라면 단언컨대 세상에서 제일 질 나쁜 양아치라 하겠지만 문제는 그가 너무도 당연하게 택운의 공간으로 넘어 온다는 사실이었다. 자연스러워도 이렇게 자연스러울까. 



코앞에 얼굴을 들이민 체 자신을 빤히 내려다보는 재환의 행동에 당황한 택운의 시선이 갈 곳을 잃고 흔들렸다. 거리를 비켜주지 않는 재환 때문에 택운은 제법 당황하고 있었다. 



“……고기.”

“........”

“안 들어가요?”



내가 잠시 돈에 눈이 멀었던 건 아닐까. 택운은 등에서 식은땀이 나는 것을 느꼈다.   



“야채 손질하실래요. 해물 손질하실래요.”

“둘 다 한 번도 안 해봤는데.”



그러니까 지금 시키는 거잖아요. 



입 밖으로 내지 못할 대꾸가 택운의 혀끝에서 돌돌 말렸다. 택운은 이번에도 대답대신 구석에 놓인 포대자루 안에서 가장 커다란 양파를 꺼내들었다. 팔짱을 끼고 말없이 서있던 재환의 시선이 분주하게 양파와 새우 사이를 오갔다.  해동된 생새우가 접시 위에서 힘없이 흐느적거렸다.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한숨을 쉬는 택운의 뒷모습을 훔쳐보던 재환은 속으로 웃었다. 재환은 재킷 안주머니에 묵직하게 자리 잡은 스마트폰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재환에게 순두부찌개를 해줄 여자는 널리고 널렸다. 앞치마에 달린 커다란 주머니에 양손을 우겨넣은 택운의 고개가 들릴 줄을 몰랐다. 주머니 속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훤히 일듯 꼼지락꼼지락 손을 움직이는 택운의 행동에 소리 없이 피식피식 웃던 재환이 팔짱을 풀고 조리대 앞으로 다가섰다. 저절로 좁혀진 거리에 택운이 반사적으로 몸을 움찔거렸다. 



말없이 자신 앞에 놓인 도마 위에 생새우를 올리는 택운의 옆모습을 빤히 훔쳐보던 재환이 어깨를 으쓱이며 양파를 집어 들었다. 초보한테 해물 손질은 어려우니까... 택운 나름의 배려였다. 재환은 진지한 얼굴로 식칼을 집어든 체 양파를 두 동강 냈다. 작은 유리그릇 안에는 괴상한 모양으로 불어난 시커먼 버섯이 둥둥 떠다녔다. 아무렇지 않게 도마 밖으로 날아간 반 토막 난 양파를 주워 올린 재환은 생각했다. 저것도 먹는 건가.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하얗고 긴 손가락이 도마 위에서 유려하게 움직였다. 세심한 움직임으로 칼집을 내고 내장을 정리하는 움직임이 차분했다. 앞치마를 입은 남자를 상상해 본적은 없지만 그것은 왠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그냥 그렇게 생각했다. 재환의 눈앞에 나타난 이 남자를 보기 전까지.



이 남자가 만든 음식이 먹고 싶다. 난처한 표정으로 손등을 덮는 소매끄트머리를 만지작거리는 행동에 재환은 수강을 취소하려던 마음을 바꿔먹었다. 물가에 길게 늘어진 수양버드나무. 가늘고 긴 눈매와 각진 곳 하나 없는 이목구비의 택운은 재환이 어디선가 보았던 그 버드나무를 닮아 있었다. 자고로 궁금한 건 찔러봐야 직성이 풀리는 법이었다. 



요리학원에 어울리지 않는 일레트로니카풍의 음악이 텅 빈 조리실에 조용히 흘렀다. 특별히 음악을 즐겨듣지 않는 자신에게도 제법 편안하게 들리는 보컬의 음색에 재환은 입 꼬리를 슬쩍 올렸다.



택운이 익숙하게 해물 손질을 마쳤다.  키에 비해 턱없이 낮은 조리대에서 손을 씻은 택운이 끙, 앓는 소리를 내며 허리를 폈다. 맞은편에선 재환이 양파를 난도질하고 있었다. 탕. 탕! 택운이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도마를 내려치는 재환을 구경했다. 양파는 써는 건지 토막 내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미지근한 물에 불려두었던 버섯을 재환 앞에 슬쩍 밀어놓았다. 이것도.  고집스러운 시선으로 재환을 빤히 쳐다보는 것으로 설명을 일축한 택운이 두말없이 재환에게서 등을 돌렸다. 순두부찌개 양념을 만들 참이었다. 택운의 강렬한 시선을 받은 재환이 도마 밖으로 탈출한 양파 조각을 집어 들며 멈칫거렸다.



“이게 뭡니까.”

“.......표고 처음보세요?”







... 다된 겁니까. 겁도 없이 순두부 한 봉지를 통째로 털어 넣은 재환이 수저로 냄비를 휘저으며 물었다. 뒷정리를 마치고 손을 씻던 택운은 냄비 가득 넘실거리는 순두부 덩어리들을 뚱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두부 좋아하시나봐요. 그렇게 많이 넣을 필요 없는데. 네 번째 반복되는 재환의 질문에 택운은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르는 것을 느꼈다. 참을 인자가 몇 획이었더라. 끓기만 하면 완성인데 굳이 말해주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아 택운은 모른 척 젖은 손을 앞치마에 문질러 닦았다. 



재료를 손질 하는 내내 무성의 무관심한 태도 일관이더니. 양념을 풀어 넣고 재료가 하나씩 들어가자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자꾸만 택운을 보채기 시작한 것이었다. 한 덩어리였던 순두부가 재환이 휘젓는 수저에 의해 잘게 으깨지고 있었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말없이 재환의 손을 노려보던 택운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식사 안하셨나 봐요.

“아. 네, 뭐.”

“그럼 찌개랑 식사하고 가세요.”



도대체 뭐하는 사람이기에 이시간이 되도록 밥도 못 먹고 돌아다니는 걸까. 택운은 조리실 한쪽 벽에 붙어있는 아기자기한 디자인의 벽시계에 눈길을 주었다. 아홉시 반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시계를 하염없이 올려다보던 택운이 조리실 한쪽 벽을 차지하고 있는 대형 냉장고를 뒤져 마른 반찬을 꺼냈다. 조리학원답게 늘 먹을 것이 넘쳐났다. 실습시간에 만들었던 두부조림과 더덕구이 그리고 톳나물 무침이 조리대 위에 가지런히 놓였다. 



가지각색의 크기로 썰린 양파와 표고버섯이 동동 떠다니는 순두부찌개를 작은 그릇에 덜어 재환 앞에 내밀자 그릇을 받아든 재환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택운은 모른 척 묵묵히 자신 몫의 찌개를 덜어 테이블 맞은편에 자리 잡았다. 유별나다고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오랜 습관처럼 굳어진 행동이었다.



재환은 제법 나쁘지 않은 맛의 순두부국물을 떠먹으며 맞은편에 앉은 택운을 흘끔거렸다. 젓가락을 놀리는 손톱이 단정했다. 요리하는 사람은 손도 예쁜가. 눈을 내리깐 체 수저를 놀리던 택운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정수리위로 따끔한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맞은편에서 재환이 잔뜩 신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어때요.”

“괜찮네요.”

“난 맛있는데.”



그렇죠 내가 만들었으니까. 택운은 뚱한 얼굴로 재환을 쳐다보고는 멈추었던 젓가락을 다시 움직였다. 저렇게 들뜬 표정으로 찌개를 퍼먹는 모습을 보니 하려던 말이 목구멍으로 쏙 들어가는 기분이라 택운은 고개를 숙인 채 슬쩍 웃고 말았다. 







*


비싼 남자의 요리수업이 시작되었습니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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