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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랍콩] 구미호 반려전 4 본문

퍝ㅌ/장편

[랍콩] 구미호 반려전 4

밤비v 2015. 11. 30. 21:35



어둠이 무겁게 내려앉은 자정. 일찌감치 저녁을 먹고 잠에 들었던 원식은 감았던 눈을 떴다. 이부자리를 걷고 부스스 몸을 일으켜 앉아 졸음이 가득한 얼굴을 손으로 쓸었다. 눈을 감았을 때와 떴을 때의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할 만큼 어두운 새벽이었다. 뻐근한 목을 이리저리 움직이던 원식은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문고리에 힘을 주고 조심스럽게 밀어내자 나무틀이 서로 부대끼며 삐걱댔다. 원식은 대청마루에 발을 디딘 체 밀려오는 서늘한 새벽공기를 쫓으려 기지개를 켰다. 온 세상이 잠에 빠져든 늦은 새벽이었지만 원식은 뻐근한 몸을 민첩하게 움직였다. 어깨를 이리저리 돌리던 원식은 물을 저장하는 장독뚜껑을 들어 올려 그 속에서 물을 퍼 올렸다. 하루 종일 땡볕은 받은 장독 안에 물은 미지근한 온도로 식어있었다. 



홍빈이 머무는 안방의 문고리를 잡은 원식은 조심스럽게 문을 밀고 방안으로 들어섰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이었지만 원식은 익숙한 동작으로 홍빈의 이부자리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희미한 달빛에 눈이 익숙해질 무렵 홍빈의 찡그린 눈가에 고인 눈물을 본 원식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의원의 정성으로 말끔하게 나아가는 상처와는 달리 홍빈은 좀처럼 기운을 차리지 못했다. 일어나 있을 때는 멍하게 앉아 있는 경우가 허다하고 잠이 들었을 때는 악몽이라도 꾸는  듯 인상을 찡그리며 괴로워했다. 어느 새벽 작은 짐승이 우는 소리를 듣고 잠이 깬 원식은 잠시 고민을 해야 했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넘겼으나 이틀째 같은 소리에 잠을 깬 원식은 뒤늦게 그 소리가 홍빈의 방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는 것을 알아챘다. 몸을 웅크린 채 이불을 말아 쥐고 신음하고 있던 홍빈을 발견한 그날 밤부터 홍빈이 잠든 새벽에 매일 홍빈의 방을 찾은 원식이었다.



원식의 커다란 손이 홍빈의 동그란 이마를 얹고 잔뜩 찡그려진 미간을 손끝으로 살살 눌러주자 억눌린 울음소리는 어느새 안정을 찾아간다. 도망친 몸으로 마음이 편할까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다만 이곳 생활에 익숙해지는 홍빈을 보고서 잠시 안심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평상시에 티내지 않지만 무의식중에 괴로워할 만큼 홍빈의 사정은 더욱 심각한 것이 틀림없었다. 



적막한 방안에 홍빈의 고른 숨소리가 일정하게 울렸다. 원식은 미동 없이 앉아있느라 뻐근해진 몸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뭉친 근육을 풀었다. 이불을 말아 쥐고 끙끙대며 신음하는 홍빈의 이마를 물에 적신 수건으로 부드럽게 닦아내기 시작했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은 방안에서 오직 손끝의 감각에 의지한 원식은 홍빈의 손은 감아쥐었다. 홍빈이 원식이 집에 머무른 지 열흘이 지나가는 늦은 새벽이었다.





분주한 소리에 잠에서 깬 홍빈은 무거운 몸을 일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문 밖으로 아침을 준비하는 원식의 인기척에 홍빈은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부비며 작게 웃음 지었다.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여 마당으로 나서자 부엌에서 분주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오랜만에 느끼는 소음들이었다. 아궁이에서 올라오는 밥 짓는 연기에 홍빈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누군가와 같은 공간에서 함께 맞이하는 아침은 홍빈의 마음을 따듯하게 했다.



원식은 김이 올라오는 밥솥을 커다란 주걱으로 고르게 저었다. 잘게 다진 고기가 들어간 따끈한 국과 잡곡을 섞은 밥 그리고 간소한 나물 반찬이 가지런히 담긴 밥상을 든 원식이 마루로 들어섰다. 홍빈은 자꾸만 흘러내리는 저고리 소매를 걷어 올려 물을 길어 올린 뒤 말끔히 얼굴을 씻고 방으로 들어와 이부자리를 정리 한 뒤 원식이 내어오는 상을 받았다. 



절에서 자란 홍빈은 본래 채식을 했지만 매 끼마다 거의 빠지지 않고 다양한 짐승의 고기를 가져오는 원식 덕에 조금씩 채식이 아닌 다양한 음식의 맛을 보고 있던 중이었다. 간소하지만 나물위주의 정갈한 음식들은 절 음식에 익숙한 홍빈의 입맛에도 제격이었다. 


“잘 먹겠습니다아.”


밥상 앞에 마주앉은 둘은 말없이 수저를 들었다. 고슬고슬하게 잘 익은 쌀알을 수저로 푼 홍빈은 참기름을 무쳐 버무린 나물 한 가닥을 얹어 입안에 넣고 꼭꼭 씹었다. 원식은 중간 중간 홍빈의 손이 자주 가는 나물을 홍빈의 밥그릇 위에 놓아주며 말없이 식사를 이어갔다.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젓가락 움직이는 소리 수저가 그릇에 부딪히는 소리만 간간히 들리는 차분한 식사였다. 홍빈과 식사 속도를 맞추려 늘 노력하는 편인데도 불구하고 늘 홍빈이 채 밥을 비우기 전에 식사를 끝낸 원식은 어린 찻잎으로 우려낸 연한 녹차를 들이키며 밥 한 숟가락을 남겨놓고 돌연 밥을 깨작거리는 홍빈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젓가락으로 부지런히 밥과 반찬 사이를 오가던 손이 점점 느려지더니 눈썹이 슬금슬금 미간으로 몰린다. 착 내리깐 속눈썹이 온통 심기 불편함을 광고하고 있는 중이었다. 동그란 눈동자에 가득 잔뜩 불만을 표출하던 홍빈을 보던 원식은 내려놓았던 젓가락을 도로 집어 들었다. 담백하게 쪄 간장으로 간을 한 나물을 집어 홍빈의 밥그릇위에 얹자 홍빈의 젓가락일이 뚝 멈췄다. 식사 후 마셔야 하는 한약 때문이었다. 밥을 안 먹는다고 해서 약을 먹지 않는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홍빈은 종종 이렇게 밥을 남기는 것으로 작은 항의를 했다. 입이 일자로 꾹 다문 홍빈이 동그란 눈으로 원식을 응시하자 원식은• 젓가락으로 홍빈 앞에 있는 밥그릇을 한 번 더 밀었다. 



“어서.”

“이제 안 아픈데.”

“다 먹었으면 약을 가져오겠소.”



짐짓 모르는 척 말을 꺼내자 뾰로통한 표정을 지은 홍빈이 다시 수저를 움직였다. 원식은 밥을 입안으로 밀어 넣는 홍빈을 지켜보다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웃음을 참기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홍빈이 먹을 한약을 가지러 부엌으로 가는 길 내내 입 꼬리가 좀처럼 내려가지 않는 원식이었다. 지독하게 쓴 냄새가 나는 약을 조심스럽게 그릇에 담던 원식은 절대로 아프지 말아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작은 항아리 안에 담긴 기름종이에 둘둘 말아 넣어둔 당과하나를 꺼내 올려놓은 원식은 적당히 데워진 약사발을 들고 방으로 들어섰다. 깨끗하게 비워진 홍빈의 밥그릇을 보니 또 비죽 웃음이 나왔다.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 꼬리를 애써 누른 원식은 홍빈에게 약사발을 건넸다.


“으…….써.”


약을 들이키는 매 초마다 다양하게 변하는 표정을 보여주는 홍빈이 신기했다. 사약을 받는 죄인처럼 세상 다산 표정을 짓다가도 올라오는 쓴 향에 눈꼬리를 축 늘어뜨린 뒤 비장한 표정으로 약을 들이킨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칭찬받기 원하는 강아지처럼 원식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이었다. 



“당과.”

“흠, 여기.”



홍빈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원식은 당과가 얹어진 소반을 홍빈 앞으로 들이밀었다. 동그란 당과가 홍빈의 입안으로 쏙 들어가는 것까지 본 원식은 괜히 얼굴이 붉어져 헛기침을 했다. 와아아아! 담장 너머로 어린 아이들이 무리를 지어 뛰어다녔다. 낮게 쳐진 담장 너머로 끝으로 보일 듯 말 듯 새카만 머리통들이 우르르 몰려다녔다. 지게를 지고 길을 나서는 일꾼들, 빨래바구니를 들고 물가로 나가는 아낙들까지 잠든 듯 고요했던 새벽이 무색하게 아침은 늘 기분 좋은 활기를 띈다. 선선한 바람이 활짝 열어놓은 문을 타고 홍빈의 코끝을 스쳐갔다. 한결 나아진 표정으로 입안에서 사탕을 굴리는 홍빈의 맞은편에 앉은 원식이 말없이 차를 들이켰다. 따듯한 찻잔을 양손으로 쥔 홍빈이 창문너머를 응시하며 잔잔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구슬만 찾을 수 있다면 원식의 곁을 떠나지 않아도 될 텐데. 홍빈은 미미하게 쓰려오는 어깨를 감싸 안으며 중얼거렸다. 몸의 상처는 빠르게 나아가고 있었다. 본디 인간이 아닌 홍빈의 상처는 얼마 지나지 않아 흉터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질 터였다. 홍빈은 텅 비어있는 집안을 괜스레 서성였다. 아침엔 원식이 그리고 낮엔 상혁과 월묘 할아버님이 종종 들러 홍빈과 함께 있어주지만 그마저도 집으로 돌아가고 원식도 오지 않는 이 시간은 홍빈을 가장 외롭게 했다. 활기차던 마을 분위기도 차분하게 가라앉고 온종일 마당 앞을 뛰어다니던 아이들도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 조용해진 골목을 보고 있노라면 다시 한 번 홀로 남겨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불쑥 치솟는 것이었다.  


홍빈은 아주 오랫동안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다음 보름달이 뜰 날을 생각하면 눈앞이 깜깜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빈은 무의식중에 자신이 원식과 함께하길 원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주지스님이 돌아가신 후 처음으로 자신을 보살펴준 인간이었다. 인간과 많은 교류가 없던 홍빈이라도 그의 심성이 선하다는 사실쯤은 쉽게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마땅히 경계해야할 상황에도 홍빈은 생각보다 더 많이 원식을 믿고 있었다. 



요기를 채울 수 없다면 홍빈은 다시 한 마리의 미물로 돌아갈 것이었다. 구슬의 행방을 알 수 없는 지금 홍빈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울기만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홍빈은 조건 없이 자신에게 정성을 다 하는 원식을 떠올렸다. 그에게 은혜를 입었으니 응당 그것에 대한 보답을 해야 했다. 이대로 망연자실하게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구슬을 찾을 수 없다면 비록 원식과 함께 할 수는 없겠지만 미물이 되어서도 원식에게 보답하면 되는 것이었다. 마치 어미를 찾은 새끼처럼 원식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아하는 스스로를 눈치 챈 홍빈은 감싸 안은 어깨를 웅크렸다. 아니다. 약해지지 말자. 부족하지만 지금이라도 무언가 할 수 있다면 늦지 않았다.



“형님 여기에요! 떡장수 형님 있잖아요. 그 형이 말해줬는데 여기 옷상점이 그렇게 유명하데요.”



원식은 상혁에게 도움을 요청한 자신을 책망하며 상혁의 팔에 이끌려 상점 안으로 들어섰다. 오일장이 열리는 날이었다. 매일 장이 서는 저잣거리와는 달리 오일장은 수도와 먼 지역에서 상인들이 물건을 가져와 팔고는 했다. 이웃 마을 혹은 타지에서 넘어온 수많은 상인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물건을 팔기위해 서창마을로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좀 더 싼 값에 물건을 사기위해 몰려든 손님들로 장터는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였다.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 물건을 팔기위해 가격을 흥정하는 소리, 길거리에서 파는 기름진 음식냄새가 한 대 어우러져 흥겨운 분위기를 만들었다. 익숙한 먹을거리도 오늘만큼은 장을 지나는 이들의 식욕을 사로잡는다. 빡빡하게 밀려드는 인파를 헤치고 장이 서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골목까지 걸음을 한 원식은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대는 풍경에 해쓱하게 질린 얼굴을 했다. 오일장에 빠지지 않고 나타나는 남사당패가 장터 한 복판에서 판을 벌였다. 멀리서 울리는 신명나는 장구소리를 피해 골목 안쪽으로 들어선 원식은 인파에 치여 엉망으로 흐트러진 도포를 정리하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도성 축제 부럽지 않을 만큼 온 마을이 시끌벅적했다.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길을 나선 것이 화근이었다. 



'그러하면 여인의 옷을 구해주세요.'


필요한 게 있냐는 원식의 물음에 홍빈은 붉어진 얼굴을 찻잔으로 가리며 말을 이었다. 홍빈은 이제 일상생활이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상처가 호전적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홍빈은 원식이 나간 사이에 조금씩 집안일을 도왔다. 원식이 가져온 식재료들로 간단한 음식을 만들거나 뒷마당에 일구어진 작은 텃밭을 가꾸는 등 자신의 몸이 부담되지 않는 선에서 움직이는 홍빈이었기에 원식 또한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원식은 여전히 매일 아침 홍빈의 약을 준비하고 홍빈의 목욕을 도왔다. 어떠한 약속도 오가지 않았지만 둘은 익숙하게 서로를 배려하고 돕는 일상에 익숙해지던 참이었다.


'신경 쓰고 있는 줄은 몰랐소.'


그런데 저잣거리에 원식이 산속에서 산짐승의 습격을 받은 선녀의 목숨을 구하고 집으로 데려와 지극정성으로 간호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거의 집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홍빈 덕분에 소문은 거의 사실처럼 마을 안에 자리 잡았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원식은 홍빈의 입에서 직접 이야기가 나오자 사뭇 당황하고 말았다. 그저 소문일 뿐이니 과열된 관심 또한 수그러들 거라 생각했던 탓이었다. 



'정체를 숨기기엔 그편이 더 나을 거라 생각해서 드리는 부탁이에요.'

'허나,'

'원식도 처음 나를 봤을 때 여인이라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원식이 입을 다물었다. 홍빈의 말뜻을 이해한 원식의 귀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홍빈은 자신의 미색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었다. 홍빈이 그러한 부분까지 걱정하고 있을 줄은 몰랐던 원식의 얼굴이 터질듯 붉어졌다. 본의 아니게 말이 없어진 둘 사이에 어색한 정적이 맴돌았다. 확실히 홍빈에겐 보통 사내들이 지니지 않은 묘한 아름다움이 흘렀다. 유난히 가는 손발이라던 지 허리 따위를 떠올리던 원식은 달아오른 뒷목을 쓸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필요한 게 있소?”

“네! 옷을 한 벌 사려고해요!”



살갑게 인사를 하고 가게 안으로 쏙 들어가 버린 상혁과는 달리 원식은 차마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비단과 천을 늘어놓은 옷가게 앞을 서성였다. 주로 여인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모양인지 고운 색감의 천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원식은 길을 나서면서 보았던 홍빈을 떠올렸다. 찢어지고 더러워진 옷을 좀처럼 손에 놓지 못하던 모습이 눈에 밟혔던 탓이었다. 은은한 옥색 저고리와 짙은 청록색 치마는 멀쩡한 상태였을 때 보았더라면 필시 아름다웠을 거라고 생각했다. 질감과 두께가 다른 수많은 옷감들을 멀뚱히 보고 서있자니 옷가게 주인이 기다란 담배를 빼어 물고는 원식에게 아는 척을 했다.



“본인이 입을 옷을 지을 셈이오?” 

“아닙니다. 여인이 입을 옷입니다.”



원식은 자신의 옷을 입고 있던 홍빈을 떠올리고는 얼굴을 붉혔다. 접어 올린 소매 사이로 드러난 팔목은 희고 가늘었다. 삐뚜름하게 서서 원식을 살피던 주인은 뿌연 연기를 공중에 뻐끔뻐끔 내뱉은 뒤 담배 불씨를 땅에 털어 버렸다. 아무렇게나 틀어 묶은 황갈색의 머리카락사이에 무성의하게 담뱃대를 꼽아 넣은 주인은 두 손을 짝 부딪치며 원식을 향해 웃었다. 



“오오이걸 어쩐담. 이래 뵈도 내가 이 바닥에서 눈썰미로 크흐게 성공한 사람이라네.”



소매를 걷어 올린 상점의 주인은 거침이 없이 원식을 이끌고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남자는 자그마한 공책을 펴들고 홍빈의 키와 나이, 피부색, 얼굴형 그리고 자태까지 꼼꼼하게 질문을 하며 붓을 들고 공책을 휘갈겼다. 얼굴이 화끈해지는 질문에 인상을 찌푸리던 원식은 시종일관 진지한 표정으로 원식을 대하는 가게 주인 덕에 시뻘게진 얼굴로 땀을 삐적이며 더듬더듬 홍빈의 몸매를 떠올려야했다. 



홍빈을 데리고 올 것을……. 원식은 기빨린 얼굴로 차갑게 식힌 과실주를 건네받아 단번에 들이켰다. 그러다 이내 홍빈이 입고 있던 자신의 옷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홍빈이 입고 있는 옷이라고는 원식이 건네준 흰색의 무명 잠옷뿐이었다. 평소에도 의복에 큰 관심을 두지 않던 터라 홍빈이 입을 옷까지 깊게 생각하지 못했던 원식이었다. 허구한 날 흘러내리는 옷을 추스르는 홍빈을 여러 번 보았으면서도 미쳐 작은 부분까지 신경 쓰지 못한 것이 원식은 못내 미안해졌다.



“본래 직접 와서 치수를 재는 것이 보통이라오.”

“사정이 그렇게 되었소.”

“직접 보면 그 아씨에게 어울리는 옷을 보여줄 수 있을 텐데 아쉽소.”

“주인의 안목만 믿겠소이다.”

“후후, 걱정 붙들어 매시게.”



붓으로 이것저것 필기를 하며 대충의 치수를 가늠하던 주인남자는 좀처럼 식지 않는 얼굴을 맨손으로 부채질 하고 있는 원식을 공책 너머로 흘끔 응시했다. 단정한 짙은 회색 도포와 짙은 청색의 답호를 입은 사내는 훤칠한 키에 강한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허리에 갈무리한 얇은 가죽 전대가 투박하지만 멋스럽게 허리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평소에 입는 무명옷이 아닌 외출복을 입고 길을 나선 원식의 옷매는 눈이 높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옷감가게 주인의 눈에도 퍽 만족스러웠다. 



“선물이오?”

“그렇소.”

“부인이 키가 제법 되는가보오?”

“크흠.”



얼굴이 붉어진 원식이 말없이 과실주를 들이켰다. 상혁은 온통 화려한 비단에 정신이 팔려 본래의 목적도 잊고 구경이 한창이었다. 비단가게 주인은 가게 뒤에 잔뜩 널려있는 옷감을 수도 없이 들고 원식의 눈앞에 펼쳐보였다. 피부가 하얗고 키가 훤칠하다고 하니 아무 색이나 다 잘 어울리겠으나 내 손님의 성정을 보아 화려한 옷감은 저어하는 듯하니 연한 색감의 천으로 준비했소. 주인은 주황빛이 도는 복숭아색 치마와 연보라색 동정이 들어간 상아색 저고리 그리고 색을 통일한 연보라색 댕기를 펼쳐 보였다.



“이걸로 하겠소.”

“형님! 이 옷은 어때요?”



상혁은 정신 사납게 온 상점 안을 돌아다니다 포근한 재질의 푸른 쪽빛 저고리와 밑단에 흰색무늬가 들어간 광목천으로 만든 짙은 남색 치마를 원식 앞에 들이밀었다. 전에 옆집 단희가 비슷한 옷을 입은걸 봤는데 예뻐서 기억하고 있지요, 후후. 상혁은 자랑스럽게 주인에게 가져온 옷을 건넸다. 이것도 주세요!



“다음번엔 형씨 옷 한벌 장만하러 오시게.”



망나니처럼 화려한 붉은 색감의 두루마기에 검은 자수가 드려진 도포를 아무렇게나 풀어헤쳐 입은 주인은 가지런히 포장한 의복을 원식의 손에 건네며 웃었다. 구불구불하게 잔뜩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짓궂은 웃음과는 달리 그의 복색은 최고급 비단으로 만든 보기 드문 옷이었다. 물론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원식은 독특한 개성을 가진 주인의 가게에서 그저 나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상혁과 죽이 척척 맞는 상점주인의 성화와 상혁의 옷 찬양에 두 배로 질린 원식은 두말없이 상혁이 고른 옷과 주인이 권하는 적갈색의 댕기까지 깡그리 사들고 부리나케 가게를 나섰다. 호오. 가게 문 앞에 비스듬히 기대선 남자는 손끝에 들린 담뱃대의 재를 털며 멀어지는 두 사내의 뒷모습을 흥미롭게 응시했다.   











*

원식의 옷차림은 성균관 스캔들의 걸오사형 복색을 따왔습니다 :D

무인들이 많이 입는 복장이라고 생각하시면 좋을것같아요 

긴소매 저고리 위에 기장이 길고 팔이 없는 조끼 형태의 윗옷을 덧입은 모습입니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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