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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랍콩] 구미호 반려전 5 본문

퍝ㅌ/장편

[랍콩] 구미호 반려전 5

밤비v 2015. 11. 30. 21:36



덕유산은 산이 높고 계곡이 깊으나 산세가 험하지 않아 유한 성정을 가진 산으로 알려져 있다. 홍빈은 나무 둥치에 짐을 내려놓고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천에 색색으로 물든 낙엽이 비단처럼 산을 휘감고 있었다. 특히 나무와 바위가 많아 작은 짐승들이 터를 잡고 살며 귀한 약초들이 많이 자라기로 유명했다. 가을의 풍성함을 그대로 간직한 덕유산은 특유의 인자하고 넉넉한 기운으로 가득했다.




솜이 덧대어진 가죽신을 신은 홍빈은 푹신하게 쌓인 낙엽을 장난스럽게 밟으며 걸었다. 실로 오랜만에 보게 된 풍경이었다. 하늘도 유난히 푸르고 높게 보이는 이곳은 공기마저 다른 듯 코끝 가득 스미는 나무향기에 홍빈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짐을 풀자마자 낙엽더미 속에서 선명하고 색이 아름다운 단풍잎을 하나씩 주우며 돌아다니는 홍빈의 발걸음이 나비처럼 가벼웠다. 나무를 베기 위해 좀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원식만 쓰이는 듯 좀처럼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홍빈의 주변을 서성였다. 원식은 나무 둥치에 기대놓았던 지게를 한쪽 어깨에 둘러매며 당부했다.



“오시午時 전에 돌아오겠소.”


“심려 마세요.”


"멀리가지 마시오."


 

거친 광목소재의 하늘빛 치마를 풀썩이며 돌아다니는 홍빈을 몇 번이고 돌아보던 원식은 한숨을 쉬며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겼다. 발소리가 점점 멀어질 즈음 신나게 이곳저곳 기웃대던 홍빈은 나무둥치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정말이지. 한시도 자신에게 눈을 떼지 않는 원식 때문에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몇 일전 원식이 잔뜩 피곤한 표정으로 양손에 커다란 짐을 가득 들고 돌아왔다. 홍빈의 부탁으로 입을 옷을 사오던 참이었다. 저녁대신 원식이 장에 나가 사온 주전부리로 배를 채운 둘은 다과상을 가운데 두고 마주앉았다. 커다란 보따리를 홍빈에게 내민 원식은 동그란 눈을 반달처럼 휘며 기뻐하는 홍빈을 보자 반나절이나 옷가게에서 시달렸던 고초가 사르르 녹는 기분을 느꼈다. 살짝 상기된 표정으로 수가 놓인 저고리 자락을 만지작대던 홍빈이 무언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같이 가요.”


“어딜 말이오.”


“나무하러.”

 

잎을 통째로 말린 산차散茶를 커다란 컵에 담아 마시던 원식이 쿨럭쿨럭 기침을 했다. 놀란 얼굴로 홍빈을 멍하게 보던 원식은 젖은 입가를 닦으며 고개를 저었다. 장에 간다면 또 모를까 산을 타겠다니. 

 


“산세가 험하고 날이 추워 안 되오.”


“그럼 이 옷은 어디다 쓰라는 말입니까.” 


“그거야 당연히 집에서…….”



 

홍빈의 세모꼴 눈을 하자 원식이 말끝을 흐리며 헛기침을 했다. 홍빈은 보자기 안에 가지런히 개켜진 치마와 저고리를 손가락으로 푹푹 찔렀다. 원식을 돕고 싶었다. 부족하지만 조금이라도 보답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 오랫동안 고민하다 꺼낸 말이었는데 단칼에 거절당하자 울컥한 마음이 드는 홍빈이었다. 

 


“그럼 이 옷을 입고 집안에만 있으라는 겁니까?”

 


원식은 슬쩍 민망한 얼굴로 찻물을 들이켰다. 물론 홍빈이 집에만 있어야할 이유는 없었다. 차라리 저잣거리에 놀러가겠다던지 약방어르신을 돕겠다던가 했다면 이리 놀라지는 않을 것인데. 산이라니. 어찌 이렇게 예상을 뒤엎는 이야기만 꺼내는 건지 작은 머리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참으로 궁금해지는 원식이었다. 홍빈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는 것에 부담을 느끼는지 굳이 집안일을 도맡아서 하고는 했다. 원식은 슬픔에 잠긴 체 자리를 보존하고 누운것 보다 무엇이든 하고자 하는 홍빈을 보는 것이 마음이 편했다. 그것을 말리면 홍빈이 더 부담을 느낄까 두었던 것인데. 심각한 원식과는 달리 뾰로통한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홍빈이 귀여워 원식은 속으로 웃었다. 

 


“원식.”


“....”


“지금 내가 여인의 옷을 입는다고 무시합니까?”


 

하하하. 원식은 결국 크게 소리 내어 박장대소했다. 귀엽다. 갑자기 원식이 웃자 놀림 받는다고 착각한 한 홍빈이 화가나 얼굴이 새빨개진 얼굴하고 원식을 노려봤다. 금방이라도 주먹을 휘두를 듯 주먹을 꼭 쥐고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데도 홍빈이 그저 예쁘게만 보이니 웃는 와중에도 걱정이 되는 원식이었다. 

 



"미안하오.”

 



한 대 쳐버릴 기세로 양손을 바들바들 떨어대는 홍빈에게 원식이 손사래 치며 사과를 했다. 원식이 말없이 차와 함께 들던 주전부리를 슬쩍 홍빈의 곁으로 밀어주자 여전히 심기상한 표정을 지은 홍빈이 콩고물에 버무린 쑥떡을 대나무 꼬지로 쿡 찍어 입에 가져갔다. 잠시 말을 고르던 원식은 들고 있던 찻잔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가을 나무는 패기가 어렵소, 도끼날도 잘 들지 않기도 하고. 무리하다 상처가 덧날까 걱정스럽소. 눈을 내리깔고 우물우물 주전부리를 씹던 홍빈이 말을 잇는 원식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생각에 빠진 원식은 손안에 쥔 찻잔의 끝부분을 엄지손가락으로 천천히 쓸었다. 덕유산은 약초가 많기로도 유명한 산이었다. 원식은 홍빈의 눈을 마주보며 소리없이 부드럽게 웃었다. 

 



“허나 약초라면 괜찮을 것 같소.”

 


 

수탉의 울음소리가 고요한 새벽바람을 타고 잔잔하게 울렸다. 그 소리에 눈을 번쩍 뜬 홍빈은 얼굴을 찡그리며 밤새 웅크렸던 몸을 길게 늘어트려 기지개를 폈다. 일찍 일어나겠노라 다짐을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잠이 많은 홍빈은 한 번도 원식보다 일찍 일어난 적이 없었다. 오늘은 무조건 먼저 일어나야했다. 그것이 신경 쓰여 결국 밤새 선잠을 자다가 닭이 울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나선 것이었다. 




그냥 밤을 샐걸. 안자는것만도 못하게 피곤한 몸을 이끌고 목간으로 향한 홍빈은 물을 데워 욕조에 가득가득 채웠다. 익숙하게 향이 나는 풀을 나무욕조 집어넣은 홍빈은 작게 콧노래를 흥얼대며 욕조 안으로 쏙 들어갔다. 김이 폴폴 나는 물을 양손으로 퍼 담아 얼굴에 끼얹은 홍빈은 약초 특유의 달짝지근한 향에 코를 찡긋거렸다. 엉성하게 묶은 머리를 풀어 물에 적신 홍빈은 몇 번이고 맑은 물을 부어 머리를 감았다. 물에 젖어 짙은 갈색을 띄는 홍빈의 머리카락이 욕조 안에서 구불구불 헤엄쳤다. 




마른 천으로 물기를 닦은 홍빈은 익숙하게 새 붕대를 집어 상처위에 감았다. 매듭까지 꼼꼼하게 정리한 홍빈이 조심스럽게 어깨를 움직였다. 조심스럽게만 움직인다면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을 정도로 홍빈의 상태는 나아가고 있었다. 아직 다 마르지 않은 머리를 한쪽 어깨 로 넘긴 홍빈은 머리칼 사이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세 갈래로 나눈 뒤 댕기를 땋았다. 엉성하게 정리된 머리칼을 얇은 끈으로 묶어낸 홍빈은 거친 광목소재의 하늘빛 치마와 같은 색의 저고리를 입었다. 발목 아래로 떨어지는 치맛자락을 단정하게 정리한 홍빈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연잎에 찐 잡곡밥과 고기전 그리고 주전부리를 작은 보따리에 갈무리한 홍빈은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밥을 지었다. 이제껏 매일 아침 원식이 하던 일이었다. 원식을 놀라게 할 생각에 홍빈은 마음이 들떴다. 엉성하지만 정성스러운 아침상을 차린 홍빈은 원식의 방문 앞을 서성였다. 살짝 어색한 기분이 든 홍빈이 문밖에 서서 물기 젖은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땋은 머리카락 끝으로 연꽃색의 댕기가 하늘하늘 움직였다. 





원식은 홍빈의 방을 자유롭게 드나들었지만 정작 홍빈은 원식이 자는 방에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잠시 입술을 잘게 깨물며 고민하던 홍빈은 손가락 끝으로 원식의 방문을 슬쩍 밀었다. 홍빈의 고민과는 달리 나무 부대끼는 소리 하나 없이 매끈하게 열렸다. 문틈으로 빠끔히 얼굴을 들이민 홍빈은 두 손을 가슴위에 가지런히 얹고 잠이 들어있는 원식의 옆으로 소리 없이 다가갔다. 잘 때는 이런 표정도 짓는구나. 홍빈은 마치 숨 쉬는 인간을 처음 본 것처럼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쌍꺼풀이 없는 크고 깊은 눈이었다. 날렵한 코끝과 붓으로 그린 것 같은 굵고 단정한 눈썹까지 찬찬히 원식의 잠든 얼굴을 들여다보던 홍빈의 시선이 원식의 입술로 향했다. 잠결에 작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원식의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안 돼.’ 홍빈은 원식위로 숙였던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앉았다. 심장이 세차게 뛰고 있었다. 동그란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방금 그게 뭐였지? 멀찍이 떨어져 벽에 몸을 붙인 홍빈이 일부러 크게 기침소리를 내자 잠에 취해 뒤척이던 원식이 느릿하게 눈을 떴다.



“아.”



지금 내가 또 꿈을 꾸는 건가. 눈앞에 여장을 갖춘 홍빈이 앉아있었다. 하나로 땋아 늘어트린 젖은 머리카락 끝으로 갈무리하지 못한 물방울이 떨어져 저고리 위로 번졌다. 원식의 눈에 매듭이 느슨한 연분홍 댕기가 눈에 들어왔다. 잠결에 몽롱한 정신 속에서도 엉성한 손재주가 홍빈답다는 생각이 든 원식은 눈앞에 보이는 홍빈의 말간 얼굴을 보며 슬쩍 웃었다. 



“아, 그게, 식사 하세요.” 




멍한 표정으로 원식을 마주보던 홍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치마 자락이 펄럭일 정도로 거세게 방 밖을 뛰쳐나가자 망부석처럼 굳은 원식이 눈을 깜박였다. 뭐야 꿈이 아니었어?


  




돼지국밥에 고춧가루를 털어 넣고 수저로 마구 휘젓는 학연을 보며 상혁이 울상을 지었다. 채식을 하는 월묘를 앞에 두고 아무렇지 않게 돼지국밥을 퍼먹다니 참으로 잔악무도한 인간이 아닐 수 없었다.




“국밥 못먹는거 알면서.” 


“나물무침 먹으면 되잖아.”




나는 왜 오라고한거야…… 학연 앞에 놓인 펄펄 끓는 뚝배기 그릇을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던 상혁이 반찬거리로 나온 콩나물 무침을 젓가락으로 집으며 투덜댔다. 평상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학연이 김이 폴폴 나는 뜨거운 보리차를 홀짝이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운이가 요즘 바쁘잖아. 날이 쌀쌀한지 학연이 목에 두른 도톰한 목도리를 여미며 수줍게 중얼거렸다. 겨울이 다가오니까 준비해야할게 많은가봐. 안 그럼 같이 먹으러 올 텐데. 시뻘건 국물을 수저로 뒤적이던 학연이 문득 생각난 듯 수저를 입에 물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맞다. 우리 마을에 구미호 있다며.”


“헐. 누가 그래요.”


“운이가.”




주모가 내려놓고 간 파전을 앞에 두고 젓가락을 집어 들던 상혁이 손을 멈칫거렸다. 덕유산의 백호가 마을에 흘러든 구미호의 존재를 몰랐을 리 없었다. 예상하지 못한 일은 아니었기에 상혁은 다소 안심한 표정으로 눈앞에 놓인 파전을 죽죽 잡아 찢었다. 만날 학연 형이랑 붙어 다니는 줄 알았는데. 그나저나 우리 운이라니…… 상혁은 낯간지러운 학연의 애칭에 떨떠름한 표정으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파전을 간장에 야무지게 적셨다. 




노릇노릇하게 지진 파전을 크게 한 조각 찢어낸 상혁이 부지런히 젓가락을 놀리기 시작했다. 역시 파전은 따듯할 때 먹는 게 제 맛이지! 챱챱 맛있는 소리를 내며 파전을 씹는 상혁이 입술을 우물거렸다. 들깨가루가 아낌없이 들어간 간장양념과의 조화가 끝내주는 맛이었다.



“설마 마을에 해코지 하지는 않겠지?”


“헐. 그런 구미호 아니거든요.”




양손에 젓가락을 하나씩 쥐고 김치를 잘게 찢던 학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걸 네가 어찌 알아? 학연의 동그란 눈동자는 상혁에게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이놈의 주둥이, 이건 입이 아니라 주둥이야 주둥이……. 상혁은 학연의 눈치를 살피며 들고 있던 수저를 내려놓았다. 상혁은 잠시 고민했다. 파전만 들고 도망갈까. 젓가락 끝을 입에 문 학연의 눈이 전에 없던 호기심으로 반짝이기 시작했다. 



“거 왜. 저번에 나무꾼 형님이 구해줬다던 그, 있잖아요.”


“선녀?”




학연도 익히 들어 알고 있던 소문이었다. 한숨을 푹 내쉰 상혁이 체념한 표정으로 바닥에 놓인 숭늉사발을 들이켰다. 숨겨 뭐하리. 



“아니 예쁜 건 맞는데 선녀는 아니고.”


“구미호?”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신이 나서 펄쩍뛰는 학연의 입을 맨손으로 틀어막은 상혁이 울상을 지었다. 비밀이에요. 상혁이 학연의 입을 손바닥으로 꾹꾹 누르며 중얼거렸다. 특히 원식 형님한테는. 상혁은 꽃다발을 받아들고 수줍게 웃던 홍빈을 떠올리며 비장한 각오를 다졌다. 상혁의 커다란 손이 학연의 작은 얼굴을 절반이나 덮자 산소가 부족해진 학연의 얼굴이 해쓱하게 질렸다.



“숨 막혀. 이 망할 토끼야.”


“아무튼- 비밀이에요 알았죠.”



학연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멈추었던 수저를 부지런히 놀리기 시작했다. 택운이 뭔가 더 이야기 해준 것 같은데. 학연이 가물가물한 기억을 되짚으며 멍하게 상혁을 응시했다. 상혁이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파전을 입에 밀어 넣고 있었다. 상혁의 젓가락이 스치는 곳마다 바닥을 드러낸 반찬그릇이 늘어가고 있었다. 




학연은 새침한 표정으로 숭늉을 들이켰다. 택운과 함께 하고나서부터 인간이 아닌 존재들을 종종 접하곤 했다. 한때 사냥꾼들에게 대대적으로 사냥되어 되어 요즘은 거의 볼 수 없다고 들었었는데, 학연의 궁금증이 썰물처럼 밀려들었다. 자고로 짐승을 길들일 때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는 법. 학연은 전투적으로 접시를 비우는 상혁을 보며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정갈한 자세로 수저를 상위에 올려놓은 학연이 큰 소리로 주모를 불렀다. 주모! 여기 파전 하나 더.




바삭하게 익은 파전의 끄트머리를 행복한 표정으로 우물거리던 상혁이 학연의 주문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형아 요즘 떡 장사가 잘되나. 상혁은 인자한 표정으로 갓 지져낸 파전을 권하는 학연을 향해 방긋방긋 웃었다.



“그래서 지금 원식 총각이랑 같이 산다고?”


“네. 뭐, 그렇죠.”


“오모.”




홍빈이라 칭하는 구미호의 미모에 대해 술술 늘어놓는 상혁을 향해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 상혁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주변 눈치를 살폈다. 학연도 덩달아 긴장한 듯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학연은 입이 근질거렸다. 벌써부터 택운이 보고 싶어진다. 빨리 가서 말해줘야지. 




저 처자인가보네. 곱기도 해라. 도둑장가 들었다더니 참말이네. 아가씨가 손도 곱구려. 어느 동네 처자인가 몰라. 겸성댁 딸내미만 아쉽게 되었네. 에그, 그 집 딸내미뿐이겠소? 박가네 둘째여식은 아예 드러누웠다네그려. 



서늘한 개울물에 손을 담그고 빨래 방망이를 두드리는 홍빈의 손가락 끝은 붉었다. 납작한 빨래 방망이를 쥔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만나는 여인들의 걸쭉한 입담은 시간이 지날수록 거침이 없었다. 허심탄회 하지만 결코 경박하지 않은 대화. 그녀들이 살아온 길지도 짧지도 않은 세월이 녹아든 정겨운 이야기였다. 이 시간을 마치 별미처럼 즐기는 아낙들의 수다였지만 그 수다의 주인공이 된 홍빈은 붉은 손끝만큼 붉어진 얼굴로 묵묵히 빨랫감을 두드릴 뿐이었다. 둔탁하게 두드리는 빨래방망이 소리 틈으로 아낙들의 낭랑한 웃음소리가 장단처럼 울려 퍼졌다. 




맑은 물에 몇 번이고 헹궈낸 빨래를 양손에 쥐고 비틀었다. 물기를 꼭 짜낸 옷감을 탈탈 털어내자 얼핏 보기에도 팔이 긴 소매가 물을 머금고 펄럭였다. 원식의 저고리였다. 먹색의 저고리는 물에 젖어 짙은 색을 띄었다. 홍빈은 자신이 입고 있는 하늘빛 저고리를 내려다보았다. 질이 좋은 광목천으로 만든 의복이었다. 홍빈은 장이 서던 날 평복이 아닌 의복을 입고 길을 나서던 원식을 떠올렸다. 

 



홍빈이 빨래터에 등장하면서부터 끝나지 않을 것처럼 이어지던 원식과 홍빈을 중심으로 돌던 소문은 이웃동네 김 아무개와 또 박아무개의 이야기로 구렁이 담 넘듯 흘러간다. 실로 엄청난 정보의 교류가 아닐 수 없었기에 홍빈은 상혁을 통해 전해 들었던 소문을 새삼 떠올렸다. 의도치 않게 얼굴 한번 본적 없는 최진사댁의 가축 수 까지 알게 된 홍빈은 잔뜩 쌓인 옷감 중 하나를 집어든 체 빨래 방망이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아이고, 자네 빨래를 그리하면 어찌하나. 옷감이 상하지 않는가.”


“새색시가 힘이 좋네그려.”


“자고로 빨래몽둥이는 말이지, 서방기둥 감아쥐듯 가볍게 잡아 두드려줘야 한다는 말일세.”


“새색시한테 못하는 말이 없구먼.”


“아니, 내말이 틀렸나.”




어느새 홍빈의 곁을 둘러싼 여인들이 홍빈에게 한마디씩 건네자 금세 주변이 시끌시끌해졌다. 왁자지껄한 대화 속에서도 각자 몫의 일을 거뜬히 해치운 그네들의 옆구리에는 방금 빨래를 마친 새하얀 옷 뭉치들이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홍빈의 곁으로 다가온 아낙이 찬물에 얼어 붉은 홍빈의 손에서 묵직한 빨랫감을 집어 들었다. 곧 지나면 산위에서부터 내려오는 물줄기에 개울물이 차가워질 터였다. 




백련사에서 나고 자랐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홍빈은 어느새 백련댁이 되었다. 부를 이름 하나만 궁금해 했을 뿐 서슴없이 자신을 백련댁이라 부르는 마을 아낙들이 감사하기도 하고 죄송스럽기도 하여 홍빈을 얼굴을 붉힌 체 묵묵히 흐르는 개울물에 손을 담갔다. 

홍빈의 빨랫감을 나눈 아낙들의 손에서 빨래방망이 두드리는 소리가 낭랑했다. 누가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는 단조로운 곡조가 입에서 입으로 물길을 타고 흘렀다. 




꿈이 아니었나. 좀처럼 떠지지 않는 눈가를 마른 손으로 쓸어내던 원식은 문틈으로 재빠르게 사라지는 하늘색 치맛자락을 멍하게 응시했다. 뉘였던 몸을 반쯤 일으킨 원식은 잠기운을 떨칠 요령으로 뻣뻣한 어깨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가뿐하게 몸을 일으킨 원식의 방안으로 뻣뻣하게 풀을 먹인 창호지를 따라 따스한 햇살이 가볍게 내려앉는다. 밤새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리하는 원식의 얼굴에 작은 낭패감이 서렸다. 저리 당황스럽게 밖을 나서는 홍빈을 보니 혹요 자신이 잠결에 결례를 범한 게 아닌가 걱정이 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문고리를 잡아당기자 문틈 사이로 복숭앗빛 댕기가 아른거렸다. 그의 집 앞 마당에서 흔히 볼 수 없던 모습이었기에 원식은 잠시 방 밖으로 나가는 것을 주저하고 말았다. 이 문을 열고 나가면 신기루처럼 그가 사라지지는 않을까. 원식은 문득 떠오른 생각을 떨치듯 고개를 저었다. 사라지다니, 참으로 허무맹랑한 생각이 아닐 수 없었다.





마당을 서성이는 홍빈의 두 뺨은 붉었다. 마당에 내려서자 기척을 느낀 홍빈의 몸이 움찔 떨렸다. 원식은 작은 짐승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는 홍빈을 보며 웃지 않으려 입술을 꽉 깨물어야 했다. 자신을 방안으로 몰아내고 우왕좌왕 부엌을 들락거리는 홍빈을 보던 원식의 눈에 홍빈의 의복이 들어왔다. 몇 일전 자신이 홍빈을 위해 구해온 옷이었다. 평범하지 않던 옷가게 주인이 추천해준 의복은 마치 홍빈을 위해 지은 듯 정갈하게 맞아 떨어졌다. 의복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 원식도 알아볼 만큼 정교하고 깔끔한 솜씨였다. 



홍빈이 차려낸 아침을 들고 나설 준비를 마친 원식에게 대나무 물통과 간단한 요깃거리를 건넸다. 붉어진 얼굴로 좀처럼 눈을 마주쳐주지 않는 홍빈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원식이 홍빈에게 받아든 요깃거리를 마루위에 올려놓았다.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이 홍빈의 어깨 위를 적시고 있었다. 젖은 홍빈의 댕기를 손바닥으로 조심스럽게 받쳐 든 원식이 마른 수건을 꺼내들었다.  



"물기를 닦는 게 좋겠소."



엉성하게 묶인 댕기를 풀어낸 원식이 마른 천으로 물기를 닦아내기 시작했다. 홍빈의 머리칼을 손끝에 감아낸 원식의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마루 기둥에 비스듬히 기댄 원식의 곁에 홍빈이 허리를 곧게 세워 앉았다. 눈을 지그시 감고 원식에게 몸을 맡긴 홍빈의 표정은 편안해 보였다. 원식의 도움이 익숙해진 탓이었다. 졸음이 쏟아질 것처럼 코끝이 간질간질한 기분에 새벽부터 깨어 몸을 움직였던 홍빈의 긴장이 나른하게 풀렸다. 약초를 구해 월묘 할아버지에게 드릴 생각이었다. 여러 가지 종류의 풀이 자란다고 하니 기대가 되었다. 




갸웃갸웃 고개를 꾸벅이던 홍빈의 작은 머리통이 원식의 어깨위로 투욱 내려앉았다. 부드럽게 머리칼을 쓸어내는 감각에 긴장이 풀려 잠이 들었다. 산에서부터 내려오는 잔잔한 바람이 잠이든 홍빈의 머릿결을 무심하게 헝클며 지나쳤다. 말없이 홍빈에게 한쪽 어깨를 내어주던 원식이 조심스럽게 홍빈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손끝에 감아올렸다. 스치는 감촉을 즐기듯 손장난을 치던 원식의 손가락 사이에 걸린 홍빈의 머리카락에 원식의 입술이 부드럽게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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